흰돌문학관/자료 방

철학서 배운 싸움의 기술

루스드라 2021. 12. 23. 12:30

철학서 배운 싸움의 기술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입력 : 2021.12.23 03:00

공동체의 어느 글쓰기 모임에서 연말 나눔 바자회를 열었습니다. 한 해를 넘기며 버려야 할 것들을 주제로 글을 쓰다 누군가가 ‘버리기보다는 나누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습니다. 마스크를 쓴 몇몇이 번갈아 나타나더니 적막하던 공동체가 화사해졌습니다. 코로나19로 대부분의 공부 모임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산사처럼 인적이 드물던 차였습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옷가지와 생활, 취미 용품 등 기부된 물품들은 여느 바자회와 비슷했지만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미니 작품전을 겸한 겁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이들이 직접 쓰거나 번역한 책과 이들이 제작한 예술품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이제 막 출간되었다며 아직 서점에 깔리지도 않은 책을 들고 온 이도 있었습니다. 인문학 공부가 쓸모와는 무관한 줄 알았는데 작품을 만들거나 책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되기도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에는 작가나 예술가도 아니고 학생이나 연구자도 아닌 이들이 더 많습니다. 공부가 깊고 좋은 글을 쓰면서도 쑥스러워하며 책 만들기는 거부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들이 인문학을,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몇 년째 난해한 철학서 강독에 매달려 온 어느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왜 공부하는가.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일이 격심한 감정노동이다. 엄마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료들 중에는 일하며 받은 스트레스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도 흔하다. 일하며 받은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치유하는 것. 이것이 내가 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다.”

- 난해한 철학서 읽기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머리 아픈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철학을 포함한 여타 인문학의 출발점이 현실, 즉 인간과 세상의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이나 예술론의 외관을 띠고 있으나 이것이 내게는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이야기,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이야기로 읽혔다. 공감하며 이들의 글을 읽다 보니 사고의 폭이 확장되고 다른 시각으로 나 자신과 세계를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점차 상처가 치유되고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나로서는 철학 공부가 병원 진료보다 더 근본적인 치유책이었던 셈이다.”

- 일을 하며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

“어려운 책을 이해하려면 한 줄 한 줄 정신을 집중해서 읽으며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반복하며 몸에 익히다 보니 생각하는 힘이 커지고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음악을 들어도, 연극이나 영화를 보아도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새로운 것을 알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는 재미와 기쁨이 공부의 힘듦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 예를 들면.

“좀 우습지만, 싸움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엔 누군가 세게 나오면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무서워하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변화는 사유, 즉 생각하는 힘이 생긴 것이다.”

- 생각하는 힘이라….

“무사유 혹은 사유 거부는 인간의 고통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다. 마침 대통령 선거철이어서 각 후보마다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지만 도대체 공정과 정의가 무엇인가. 시민을 학살하며 정권을 잡은 전두환도 정의 사회 구현을 내세웠다.”

- 공정과 정의라니, 결국 철학은 실생활과는 관계없는 공부인가.

“천만에! 근본에 대한 사유 없이 개인이나 사회는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 누구나 잘사는 것이 목표지만 잘사는 게 무엇인가? 공부하면 할수록 느낀다. 철학만큼 현실적인 공부,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공부가 드물다는 것을. 철학을 만난 덕분에 내 삶이 정말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12230300125#csidx2c4f0a82d247dbd89dc12f7a571b3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