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돌문학관/평론

시 읽기(남도문학 카페에서 올김)

루스드라 2023. 3. 18. 12:33
문학방 1 (시, 소설, 동화)시 읽기
soowung추천 0조회 2006.05.29 19:5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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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읽기


조수웅


시는 단순한 지식과는 달라서 느끼고 감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시를 촘촘히 읽어서 반드시 그 오묘한 맛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시는 고도로 조직된 함축어로 이뤄진 만큼 그 복잡한 의미망을 뚫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단숨에 읽어낼 무슨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있다. 김흥규 교수(고려대)가 제시한 다음 요령이 바로 그것이다.


(1) 친구 사귀듯이, 또는 자신의 행위처럼
친구를 사귀려면 우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듯 시를 읽을 때는 우선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귀고 싶은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상대에게 자신의 자존심만 내세우려든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맺어질 수 없다. 시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는 인쇄된 지면 위에 있어서 스스로 말하지 못하므로 독자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 시도 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시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여는 가장 좋은 태도는 선사상에서 말하는 무심(無心)1) 상태로 시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시에 나오는 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읽으려는 시 속에 이해가 안 되는 낱말이나 어려워 보이는 구절이 있더라도 자기의 상식이나 지식으로 밝혀내려하지 말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마치 자신이 한 말인 양 읽어 가야 한다.


지난 초파일
산사(山寺)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나는 문득 해탈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그 여자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잠시 돌아다보니 그 여자는 어느새
얼굴에 주근깨 핀 산나리가 되어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또
내가 사는 마을까지 따라와
가장 슬픈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밤낮으로 소쩍소쩍
비워둔 내 가슴에 점을 찍었다.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검붉은 문신(文身)처럼 서러운 점을 <산나리꽃, 임영조>


이 시의 작중 화자는 ‘나’다. 나는 사귀던 여자와 호젓이 산사에 갖다가 문득 해탈이 하고 싶어서 함께 간 여자를 버리고 왔다. 왜 작중 화자는 그 즐거운 시간에 해탈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으며, 사랑하는 여자를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버리고 왔을까? 질문하지 말고 독자 자신이 바로 그런 행위를 한 것처럼 생각하자. 말하자면 독자 자신이 작중 화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남이 한 행위처럼 왜 그런 짓을 하는가? 라는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묻기 전에 스스로가 시 속의 인물이 되어 그의 말과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 속의 나(이제 작중 화자가 아니라 자신이다.)는 한참 연애중이다. 초파일에 데이트 삼아 산사 같이 갔는데 갑자기 해탈의 경지를 생각한 것이다. 이 경쟁이 치열한 세상을 살다보면 문득 산다는 게 뭔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뭘까?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다가 만사로부터 벗어나 해탈의 경지로 가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그녀를 버리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 돌아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산나리 꽃이 되어 울고 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잊혀지기는커녕 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서러운 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시를 친구 사귀듯 읽는다는 말은 시에 담긴 경험의 세계 속에 바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들어감을 의미한다.


(2) 주인공의 상황, 배경, 입장을 알아야
이렇게 해서 작품의 분위기와 흐름을 파악한 뒤에 할 일은 시 속에서 주인공이 처해 있는 입장이나 처지를 아는 일이다. 그것(시어가 갖고 있는 유기적인 관계)을 모르고서는 시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눈 앞에 있는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 때문에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고, 그가 처한 입장과 상대는 누구인가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도 되고 재미도 난다. 가령 영화나 소설을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여 어리둥절할 것이다. 시도 시 속에 주인공이 처한 입장을 독자가 알아야 그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정시에는 사건이랄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그래도 짤막한 장면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곧 시에서의 작중 상황인데 그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주인공의 입장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시한 ‘산나리 꽃’의 상황과 그 상황 속에 처해 있는 주인공의 입장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연인과 초파일날 데이트 삼아 산사에 갔다가 해탈교를 건너며 문득 해탈이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 해탈이 떠 오른 것은 장소가 ‘산사(山寺)’였다는 배경이다. 만약 ‘산사’ 아닌 극장이나 카페에 갔다면 해탈교도 없거니와 더더군다나 해탈의 경지는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래서 산사가 중요한 상황이 된다. 더 중요한 상황은 ‘산나리 꽃’이다. 산사이기에 주인공(작중 화자)이, 연인을 상징하고 그의 슬프고 가엾은 사랑을 나타내는 산나리 꽃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또 이 산나리 꽃으로 하여금 아무리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서러운 점이 생긴 것이 아닌가? 못 생겼다는 이유로 내가 버린 여인처럼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피어 있는 한 떨기 산나리 꽃의 배경은 바로 산중이다. 그 장면이 없었던들 주인공에게 지나간 여인을 되살려 내어 그 순수하고도 애절한 사랑을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문신으로 남게 일깨워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 속에 주인공이 처해 있는 입장이나 장면, 배경을 바르게 알아내지 못한다면 표면적 이해를 뒤집어 이면을 읽어내지 못함으로써, 시의 전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진정한 시의 의미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시는 그런 상황들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일수록 친구를 사귀는 마음으로, 마치 자신의 행위인 것처럼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리듬을 타고 반복해서 읽거나 외워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아니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많이 읽어봄으로써 무의식 속의 통일된 이미지를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3) 이해를 느낌으로
시는 머리를 써서 가르치고 배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듯, 제 아무리 큰 백화점이라 할지라도 ‘평화’라는 상품을 팔지 않듯 시는 결국 독자가 시와의 몸부림 속에 터득해서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터득하고 느낄(이해하고 감상할) 것인가? 여기서 다시 김흥규 교수가 권한 네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 시를 억지로 머리로 읽으려 하지 말고 가슴부터 읽자. 다시 말해서 지적으로 따져서 수학 문제를 풀듯이 알려고 하기보다 우선 전체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러저러한 의미라고 분명하게 분석하여 알기 어렵더라도 ‘어쩐지 마음에 든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좋은 것 같다’라는 느낌이 중요하다. 이 느낌이 있으면 여러분은 그 시를 80 퍼센트 정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미술, 음악, 문학 같은 예술에 있어서는 머리로 아는 것보다 느낌으로, 몸으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둘째, 어쩐지 좋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차차 지적인 이해가 더해진다면 좋은 일이고 가능한 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지만, 잘 풀리지 않는 부분의 의미를 너무 따져 들어가기에 애쓰지 말자. 한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도 풀리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때가 되면 풀릴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를 좋아하거나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아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란 점을 알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다 알지 못하면서도 서로 사랑하며 어울리어 살아가고, 그러는 동안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시도 이와 같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더 알고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셋째, 거듭 읽어도 전혀 좋아지지 않거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작품이 있다면 힘들여 읽으려 하지 말고 덮어 두자. 남들은 이 시를 좋아하고 잘 아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아쉬워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농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교향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풍경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추상화를 아끼는 이도 있다. 시도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작품이 다를 수 있다. 내가 잘 알고 즐기는 작품을 다른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다. 세상은 넓고 시는 무수히 많다. 어떻게 그것들을 다 알거나 좋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주변에서 눈에 띄는 것, 친근한 것, 쉽게 마음에 들고 좋아할 만한 것부터 사랑하고 차차 알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이 절대로 가치 있다는 고집으로 평생 사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지만, 손 닿는 데서부터 차차 길을 열어 가는 것은 필요하다. 명작으로 평가되는 어떤 작품을 잘 알지 못한다고 기가 죽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름난 걸작이라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이 좋아한 결과 그렇게 된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특이한 작품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남다르게 처음 좋아한 여러분이 장차 높이 평가받을 걸작의 가치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요컨대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을 통해 시를 느끼고 차차 알아 가는 것이며, 나아가 일상에서 억압된 잠재의식이 시를 읽는 동안 튀어나오게 하는 것, 즉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시인은 가면을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예, 평소에는 이성(理性)으로 억압하고 있던 이성(異性)에 대한 감정이 시를 읽는 동안에는 가면을 벗는다. 술에 취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넷째, 이와 같이 시를 읽어 나가면서 때때로 다른 사람이 시를 해설․분석한 것을 눈여겨보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맛이나 의미를 알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진 시 해설서를 구하여 읽는 것이 좋다. 시 해설서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해설서에 씌어진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고 그것에만 매달린다거나 무슨 절대적 지식처럼 기억해 두려고 함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 해설서는 그 방면에 상당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비교적 믿을 만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그의 생각과 느낌이 전부일 수는 없다. 시 해설서의 가치는 독자들로 하여금 좀더 나은 안목으로 시의 세계를 찾아보도록 힘을 길러 주기 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