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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다름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긴다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다
  • 2020. 03.18(수) 18:38  박명지 <청년문화허브 회원>

 

이번 기고 글 주제는 ‘꼰대 문화’에 대해 쓰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꼰대는 부모나 선생님 등 나이 많은 어른을 빗대어 부르는 표현이다.

요즘은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며 배척하는 사람을 말한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많이 다양해졌지만, 사회 여러 곳에서 우리는 꼰대를 만날 수 있다.

‘꼰대 문화’에 대해 쓰려고 했던 이유도, 내 주변의 ‘꼰대’에 대한 분노에 비롯했다.

나의 지인이자 사회 선배인 그는 고고한 성정에 평소 누구에게나 예의를 갖춘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엄격한 성격이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엄격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의 성격이라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엇보다 엄격한 성격인 그를 ‘꼰대’라고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대개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들에 대해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본받을 만한 태도를 가진 그를 ‘꼰대’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은연중에 서려 있는 타인에 대한 비난 같은 대화의 톤 때문이었다.

간혹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건 아니지~” 식의 표현을 했다. 내가 둔한 탓에 그럴 때 만 하더라도 사람 생각이야 서로 다른 법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사고의 자유를 존중하며 그와의 사회적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그의 타인에 대한 비난이 어느 시점부터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그의 생각을 바꾸거나 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를 만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줄이게 됐다.

나에게 그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시 말해 그의 입장에서 “나의 태도나 생각이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가 나를 비난하고 지적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와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인지했을 즈음 그는 나의 ‘꼰대’가 됐다.

타인과 자기 생각이 다르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꼰대’같다거나 ‘꼰대’가 될 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르구나’와 ‘다르지만 그건 아니지’라는 말의 의미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자세히 언급할 수 없는 몇 가지 상황을 겪으며, 그에 대한 분노와 ‘꼰대 문화’에 대한 비판을 써보려 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보니 나는 얼마나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며, 타인에게 나의 잣대를 가져다 비춰보고 비판하진 않는가 생각해봤다.

타인을 비판할 만한 사람인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도 그를 비판할 권리는 없었다.

나 역시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의견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와 다른 면에 대해서 굳이 상대방에게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타인을 수용하며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이런 태도가 상대에 대한 이해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모습에 대한 진심은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의견에 ‘그건 아니지’라는 마음 속 판단을 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필요한 갈등을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가르치려 드는 말 많은 ‘꼰대’처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겐 잠재적 ‘꼰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꼰대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비판 대신 ‘꼰대 문화’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자면, 오늘날 ‘꼰대’는 세대를 초월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을 포함해 나와 생각이 다른 주변인일 수 있다. 가깝게는 평소 좋아하던 직장 선배이거나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꼰대’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대상을 지칭해왔다. 그리고 손아랫사람을 향한 윗사람의 평가와 지적을 두고 ‘꼰대 짓’이라고 한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로 끝맺는 반갑지 않은 팩트로 모든 세대의 청년들은 연장자의 ‘꼰대 짓’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꼰대 짓’을 지금의 청년 세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 때는 말이야”를 내뱉는 어른들을 ‘꼰대 짓’을 “라떼는 말이야”라며 흘려듣는다. ‘꼰대 문화’를 유쾌하게 거부하는 청년층들에게 기성세대의 ‘꼰대 짓’은 더 힘을 쓸 수가 없게 됐다.

모두가 그렇지 않지만 이런 문화를 이해하는 기성세대들은 청년들과 있을 때 “요즘은 그렇게 ‘꼰대 짓’하면 욕먹는다”라며 청년 세대를 향한 간섭을 지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꼰대 문화’를 거부하는 청년들과 그들을 이해하는 어른들이 있으므로 ‘꼰대’와 ‘꼰대 짓’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닐까? 아쉽게도 기나긴 ‘꼰대’의 역사(?) 덕분에 우리는 ‘꼰대 DNA’를 버리지 못한 듯하다. 이상하게도 그 ‘꼰대 DNA’를 청년층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젊은 꼰대’는 20-30대 청년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단어인데, 글 서두에 언급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주장하는 성향의 젊은 사람을 말한다.

서로 다른 세대의 문제라고 여겨졌던 ‘꼰대 짓’이 청년층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기성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꼰대 DNA’ 때문일까? 나는 그런 태도의 기저에는 자신이 상대보다 더 우월하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타인의 면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는 경우, 상대를 향한 젊은 ‘꼰대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젊은 꼰대’가 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꼰대 짓’을 한다고 여기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자기 주관의 옮음을 상대에게 처한 환경과 상황보다 우선으로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적 사고를 하고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런 면을 ‘꼰대’의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소통의 형태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대화인지,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을 펼치는 것인가를 잘 분별해보면 자신의 행동이 ‘꼰대 짓’인지,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인지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스스로에 대한 평가나 비판을 원하지 않는다. 설령 객관적 평가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 반응은 지적이 아니라 이해와 납득에서 비롯된 구체화된 격려일 것이다.

타인에게 조언할 때 자신의 마음에 울림이 없다면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상대에게 쏟아버릴 독설이 될 지, 상대를 위한 진심어린 조언이 될 지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피면 될 것이다.

우리가 조언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 대상은 평범한 주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자신도 평범할 것이다.

특별한 사회적 문제가 있어 교화될 필요가 있거나 바꿔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린 가끔 자신의 잣대로 스스로 ‘꼰대’가 되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