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드라 2025. 2. 1. 14:15

  글쓴이 봉민근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한 대목이다. “섭리란 묘한 작용을 한다. 갑의 죄에 대해서 을의 죄명을 씌워 처벌하는 것이다. 꼭 벌을 받아야만 마땅한 인간인데 적용할 법조문이 없을 때 섭리는 이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격언 그대로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되 가늘게 간다.” 그날이 올 것이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고 진실이 이긴다. 나는 우주의 원리 그리고 하늘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을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는다.

오늘은 졌다. 그러나 내일은 이길 것이다. 하늘이 충분히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둠이 짙어야 별을 볼 수 있다.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날이 곧 밝아온다. 우리는 당장 전개되는 현상에 교만 해지거나 혹은 의문을 품고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엔 하늘의 섭리가 있으니 겸손히 그 뜻을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개인의 인생이나 기업, 권력도 마찬가지로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반성/류근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제 품 안에서 평화롭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서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 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난 요즈음 하늘을 자주 본다. 그런데 사람도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물이 맑으면 달이 와서 쉬고, 나무를 심으면 새가 날아와 둥지를 트는 것처럼,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을 만나 함께 있으면,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사람은 나의 장점을 세워주고, 쓴 소리로 나를 키워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난 정의(正義) 를 읽는다. 정의는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으로 잘못한 것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싶다. 왜냐하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삶의 확실한 기초는 재산이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늘에 있다. 하늘, 자연 안에서 만이 재산의 사용도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자연, 하늘이 만들어 준 모든 재화는 개인주의로 인한 분열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안에서 나눔으로써 사랑을 이루는 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돈은 사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돈은 인간에게 권력을 주어, 그 권력을 남용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문제이다. 돈이 많으면 타자에게 둔감하다. 그리고 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왜냐하면 돈은 이웃을 형제가 아니라 극복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그리고 인문(人文)의 삼중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삼중주의 리듬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 질문도 궁극적으로 이 배치 안에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인간이 천지,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땅을 보는 안목도 잃었다. 땅이 투자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인간이 천지보다 더 높은 존재로 올라섰다. 그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공격을 당하며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이제 앎은 자연지의 광대한 지평에서 벗어나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문명지로 축소되었다. 천지인을 아우르던 그 통찰력은 한낱 신화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노자 <<도덕경>> 제25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나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인간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 뿐만 아니라, 지구의 동거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과 잘 어울려 산다.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이 가져오는 물, 공기, 햇빛을 흠뻑 받으면서, 주어진 짧은 수명을 살면서,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 저 하늘에 있는 해, 달 그리고 모든 행성들은 지난 수 억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자신의 리듬으로 하염없이 갈 것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주가 운영하는 법칙인 도는 자연스럽다. 물과 같이 고요하게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저 낮은 곳으로 조용하게 흘러간다. 불안해 하지 말고,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나도 그 리듬 속에서 살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