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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의 개념, 그리고 동심과 서정적 자아

루스드라 2022. 7. 19. 21:56
문학방 2 (칼럼, 수필, 평론, 희곡, 기행)동시의 개념, 그리고 동심과 서정적 자아/계간 『열린 아동문학』 계평(2022년 봄호)
김관식추천 0조회 022.03.26 10:3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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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열린 아동문학』 계평(2022년 봄호)


동시의 개념, 그리고 동심과 서정적 자아


김관식


1. 들어가며


  동시는 어린이가 독자 대상이 되는 시이다. 따라서 동심을 담아야 한다는 제약이 뒤따른다. 그래서 시 쓰기보다는 동시 쓰기가 더 어렵다. 그런데 시를 모르고도 동시는 쉽게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린이 시 같은 동시를 쓰는 뻔뻔한 아동문학가들이 많은 실정이다. 이들은 주위의 어린이들의 행동을 피상적으로 본 것을 그리거나 어릴 때 경험을 환기하여 어른 아이가 된다. 자신이 어른 아이가 된 마음을 주관적인 동심으로 착각한다.
  이들은 아예 시 공부를 하지 않고서도 동시를 쓸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동심은 어린이 마음이니까 자신이 어릴 때 생각을 떠올리거나 자녀들을 키웠던 경험을 환기하여 시를 쓰면 된다고 무턱대고 뛰어든 사람들이다. 자신을 돋보이려는 아동문학가, 또는 동시인 페르소나로 자신의 명리적 가치를 실현을 우위에 두고 어린이들의 정서에 미치는 사회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구현하는 시의 근원적 모습을 아동문학가 페르소나로 위장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심리적인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때문에 어린이들의 정서공감과는 유리된 유치한 말장난을 동시로 착각하고 자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연결하는 서정시의 특성을 살려 미적 체험을 동심적인 체험과 상상력으로 동심을 구현해나가야 어린이들은 물론 누구나가 공감하는 동시가 창출될 것이다. 자아와 세계가 동심 속에서 만나 동일성을 추구하는, 다시 말해서, 주체와 객체의 공시적인 동일성을 찾아 어린이들의 미적체험을 형상화하는 시창작의 본래적인 기능을 되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기존의 감상적 비평과는 달리 동심과 서정적 자아의 구현과 시창작 방법의 기능 신장에 초점을 두는 계평을 쓸 작정이다. 아무튼 계평을 통해 우리 모두가 자성하는 계기가 되고, 좋은 동시를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시창작 본래적인 기능을 회복하고, 동심과 서정적 자아를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 동시의 개념, 그리고 동심과 서정적 자아


  동시의 개념은 동시 창작에 가장 중요하다. 동시는 시 쓰기에다가 동심을 담아야한다는 제약이 있는 만큼 어린이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들의 정서 체험과 상상력에 밀접한 구체적인 표현의 시여야 한다. 따라서 소재나 시어 등의 제약이 따른다.
  이원수는 “그것은 성인시에서 느끼기 어려운 동심-즉 어린이들의 마음이 스며 있다는 것이다. 동시는 이런 어린이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에 특히 동시인 것이다.”라고 동시와 시의 차이점을 분명히 규명했으며, “동시는 동심의 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동심’은 “천진무구한 것, 죄 없는 것, 소박 순진한 것, 세파에 더러워지지 않은 마음”이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아동의 심정을 노래하고, 혹은 아동의 심정으로 세계를 보고 노래”한다면, 그 시는 틀림없이“아동을 위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동시는 ‘동심의시’고, ‘아동을 위한 시’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충 간추려 본다면, (1) 아동의 감정과 생각이 나타나 있는 시, (2) 아동이 느낄 수 있는 시, (3) 동심으로 씌어진 시, 이런 것들을 동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의를 내리고 있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또한, “동심이란 이름의 호신부(護身符)를 가슴에 달고 문학적 미숙을 호도하며 행세”하는 아동문학가 페르소나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동시는 동심을 담아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동심에 대한 정의를 “동심은 유치한 어린이의 심리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의 세계를 화해와 조화를 통해서 사물과 의식 세계와 자아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전인격적인 실체를 이루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라며,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실현하는 시의 본래적인 모습으로서의 서정적인 자아로서의 동심을 담은 시여야 한다고 정의했다.
  우리가 동시를 쓰는 창작행위도 어찌 보면 동심, 즉 서정적 자아라는 본연지성을 찾아가는 것이며, 동심을 통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주장하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장소실제로 자리매김할 장소로서 존재하는 유토피아(utopia)라 할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공간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공간이라면 이에 상응하는 공간으로서 현실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로서 헤테로토피아를 창작행위를 통해 실현한다. 따라서 시인이 시상을 전개하면서 동심과 서정적 자아를 발현하여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즉, 시인은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실제 현실화된 유토피아와 같은 공간으로서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과의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다. 다시 말해서 시창작 행위는 내면의 세계와 외부 세계와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한 공시적인 동일성, 즉 본연지성을 찾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서정적 자아는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것이라고 보아야 문제가 해결된다. 또한 서정적 자아는 세계와 접촉해서 세계를 자아화하고 있는 작용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세계와의 접촉 없이도 존재하는 자아라고 보아야만,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인정될 수 있다.
  인간은 자연과 동심을 그리워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점에서 자연은 인간의 본래적 고향이며 동심은 인간의 심리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자연과 인간 자연과 동심은 인접해 있다.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의미 차원에서뿐이지 존재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그래서 많은 동시인들이 자연 소재의 동시로 동심을 표현해왔다. 오늘날 산업화 도시화로 많은 어린이들이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으며, 컴퓨터의 발달로 가상공간 속에서 동심이 관념화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들에게 간접체험을 실제의 정서체험으로 공감하도록 형상화하여 구체적으로 표현한 동시여야만이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 따라서 동심과 서정적인 자아의 일체화하고, 정서체험을 형상화시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진술해야할 것이다.


3. 동심과 서정적 자아를 발현한 우수 동시


  동시는 동심의 눈으로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상상력을 펼쳐야 좋은 동시가 된다. 동시도 시이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지향한다. 시인은 자신의 현실을 내면으로 끌고 와서 동심과 서정적인 자아로 변용시켜 표출하고, 시적 소재를 통해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와의 동화나 투사로헤테로토피아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심과 서정적인 자아를 발현한 우수 동시로 김원석의 「사람으로 태어나 미안」(2), 박경용의 「바다바라기 강아지풀」, 이창건의 「봄 길」, 황베드로의 「골라잡기」, 박방희의 「아픈 날」 , 김종상의 「냇물을 건너며」, 이문희의 「비밀번호」 등이눈길을 끌었다.
  김원석의 「사람으로 태어나 미안」(2)은 연작시의 형태인데, 인간위주의 생태의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였으나, 시제에 주제를 서술적인 형태로 진술해 내면세계를 드러냈다. 화자가 직접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미안”이라는 시어보다는 “사육사”, “동물 보호사”, “생태 지킴이” 등 구체적인 명사형의 시제로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시제에 주제를 드러내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진술 위주의 표현으로 화자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들러날 경우 시적인 미감이 격감하게 된다. 묘사와 진술의 표현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공감이 가는 좋은 시가 탄생된다고 한다. 김원석은 지구촌의 당면한 생태문제를 동시를 통해 미래세대에게 전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추구로 생태환경이 파괴한 결과, 최근 지구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동물들의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생태주의 생태관으로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로 표현한 것은 시인으로서의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이루려는 강한 의지때문일 것이다.


멧돼지가/고구마 밭을/쑥대밭으로 만들고//수리부엉이가/양계장 닭을/훔쳐 가고/주인에게/버림받은/개들//산으로 올라가/들개가 되어도/그들만 잡아 없애려 했지/너희 마음을 몰라 미안.//-김원석의 「사람으로 태어나 미안(2) 전문(『열린아동문학』 2021. 겨울호)


  코로나 펜데믹 시대인 오늘날, 지구촌의 생태문제에 대한 시인들의 고발과 자각의식은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함일 것이다. 오늘의 생태 상황에 대한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 자아는 생태 문제를 자신의 내부세계로 받아들이고,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이루기 위해 헤테로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행동하는 양심일 것이다.
박경용의 「바다바라기 강아지풀」은 헤테로토피아를 갯마을로 상정하고 노년기의 쓸쓸한 정서를 강아지풀로 투사한 동시조이다. 이처럼 동시를 통해 동심과 서정적 자아의 화해를 시도함으로써 단순히 동시가 어린이들을 위해서 쓴다는 동심천사주의적 비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 장르보다 한 차원 높은 시의 원형임을 일깨우게 한다.


저를 두고 온 자리를/지키는 강아지같이//갯마을 할아버지/단골 쉼터 의자 곁에//한 떨기 강아지풀이/주인을 기다립니다.//솔밭 아래 바닷길이/환히 열려 뵈는 날은//불현 듯 할아버지가/찾아오실 것만 같아//꼬리를 곧추세우고/바다바라기 합니다.//-박경용의 「바다바라기 강아지풀」 전문( 『열린아동문학』 2021. 겨울호)


  동시조로 이처럼 쓸쓸한 정서를 강아지풀과 자아를 동일시하여 인간의 존재의 근원인 동심과 사랑의 메시지를 형상화해내기란 시적인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동시는 동심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 동심은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고차원적인 철학을 구체적인 사물로 표현해내는 저력은 동시인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일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동시들이 피상적인 동심을 어린이 생활로 그릇 인식하고 어른 아이가 되어 어린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이나 생활을 그려놓고 동심을 담은 동시라고 내세우는 상황에서 시적인 미감을 한 차원 높여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완성도가 높은 동시의 본보기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창건의 「봄 길」이 시적인 완성도가 높은 동시였다.


겨울 내내/병원만 오고 가던 엄마가/새 봄, 봄 길을 나왔다//그 꽃 그 자리/다시 피어도/그 꽃 아니다//그 나무 그 자리/다시 살아도/그 나무 아니다//-이창건 「봄 길」 전문(『동시 발전소』 2021. 겨울호)


  동시는 관념의 말장난이 아니다. 사물의 외형만을 장식적 수사에 의존하여 미화하거나 어린이인척 흉내만 내고서 시적인 미감이나 상상력을 촉발할 수는 없다. 상상력은 세계의 자아화하는 시의 세계관을 탄생 시킨다. 따라서 시의 재료가 실제 체험이라면, 여기에서 상상력을 통해 시인은 몽상하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그렇지만 상상력은 관념 여행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관념 속에서 얽매여 관념 속의 생각들을 이미지로 착각하고 그것을 서술하는 것을 시로 알고 있다. 상상력은 시적인 소재의 이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기능을 발휘하게 되고, 서정적인 자아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1연의 병원만을 오고 가는 엄마의 봄 길은 실제 체험의 진술이다. 2연은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의 화해를 모색하는 공간으로서의 헤테로토피아이다. 존재의 소멸과 생성, 시간에 따른 생명현상의 변화를 새 봄의 이미지와 병이 낫다 바라는 강한 의지를 “아니다” 부정어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여 “강한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는 동심과 서정적 자아를 표현한 수작이었다.
황베드로의 「골라잡기」는 동심을 우주로 확장하여 상상력을 펼친 동시였다.


밤이면 하늘이/별을/전부 쏟아놓고//날 보고/골라 가지래//공깃돌 다섯 개/골라잡기 어렵네.//-(『아동문학 세상』 2021. 겨울호)


  밤하늘의 별을 공기놀이를 하고 싶은 돌멩이로 상상력을 펼쳐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 실현했다. 또한 단순명쾌해야 한다는 동시의 특성을 잘 살려냈고, 동심을 잘 표현한 수작이었다.
  박방희의 「아픈 날」은 시적 체험을 간결하게 이미지로 제시해 진술했다. 샌드라 거스는 『묘사의 힘』에서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말하기는 추상적이다. 보여주기는 독자의 머릿속에 구체적이고 상상한 그림을 그려낸다.”라고 글쓰기의 기본을 역설하고 있다. 많은 시인들이 특히 동시를 쓰는 동시인들이 말하기, 즉 진술적 표현으로 시를 창작하고 있다. 이는 독자를 위한 정보 전달에 치중하다가 보면 시 속에 숨어있는 세계를 발견할 기회를 박탈하고 상상력을 축소한다. 시는 체험과 상상력의 소산이다. 관념어의 표현은 뜻이 광범위하여 구체적이지 않을 뿐더러 체험과 유리되어 공감의 폭이 줄어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적인 표현은 우리가 사물을 시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 등 다섯 가지 감각으로 인식하듯이 묘사적 표현은 오감에 의존하기 때문에 공감의 폭이 넓다. 때문에 시의 표현은 경험의 진술에만 의존하기보다는 형상화를 통한 구체적인 감각의 표현인 묘사하기, 보여주기의 표현과 조화를 이루어야 시너지효과가 발휘된다.


조바심 난/두 귀가/담 너머/골목으로 열려/나팔꽃처럼/하루 종일/피어 있다.//-박방희의 「아픈 날」 전문(『아동문학평론』 2021. 겨울호)


  「아픈 날」의 경험을 보여주기 위해 나팔꽃의 이미지로 제시했다. 어린이들이 「아픈 날」의 심정을 환기시키기 위해 시적 정서와 밀접한 “두 귀”, “담”, “골목”, 나팔꽃“의 사물로 묘사하기, 즉 보여주기로 표현하고 있다. 다만 화자와 관찰자가 이원적으로 분리된 상황이다. 좋은 시는 화자와 관찰자가 일체화 되어있다. “조바심 난/ 두 귀”의 주체는 화자다. 그런데 “나팔꽃처럼/하루 종일/피어 있다.”는 상상 속의 관찰자인 화자다.
  김종상의 「냇물을 건너며」 는 냇물을 건너가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경험을 구체적으로 환기시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추구한 시적 완성도가 높은 수작이었다.


냇물을 건너가며 보니/구름이 물에 빠져 있었다//피라미들이 구름 속에서/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징검다리에 앉아 건지려니/구름이 손끝에서 부서졌다//징검다리를 건너가니/부서진 구름이 따라 나왔다//냇물을 다 건너서 보니/구름이 하늘에 가있었다.//-김종상의 「냇물을 건너며」 전문(『새바람 아동문학』 2021. 제33집)


  징검다리는 냇물이 흘러 길이 막힌 곳에 사람이 물에 젖지 않고 건널 수 있게 큰 돌을 놓아둔 것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면 냇물 속에 구름이 보이고 물속의 피라미들이 구름 속을 왔다갔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생한 경험을 환기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그럼으로써 천지인이 함께 어울리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이루는 품격있는 동시를 창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문희의 「비밀번호」는 친구끼리 함께 어울리는 동심을 압축해서 “비밀번호=함께”로 발상한 동시다.


친구 마음을 여는/비밀번호는 무엇일까?//알았다, 알았어/함께 웃는 얼굴/함께 하는 어깨동무//비밀번호가/〈함께〉였구나!//-이문희의 「비밀번호」 전문(『꿈나무 새싹 쑥쑥』, 한국좋은동시재능기부사업회, 2021, 2호)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함께 어울린다. 싸우다가도 다시 화해한다. 동심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앞세우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
  오늘날 첨단 디지털문명의 발달로 각자가 비밀번호를 많이 지니고 살아가는 세상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비밀번호를 알아야 집으로 들어서고 귀중품을 보관하는 금고, 은행업무, 핸드폰 등등 비밀번호가 있어야만이 자신을 보호받는 시대다. 이런 사회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며 마음껏 유대감을 형성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라는 비밀번호 발상으로 시상을 전개해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추구했다. 다만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어린이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없이 억압하는 교육환경이 안타까울 뿐이다. 마음껏 뛰어 놀지 못하고 학원을 전전해야만 하는 오늘의 어린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로서의 헤테로토피아 공간을 동시로 제공하는 일은 어린이들의 갈등의 치유와 위로의 창구가 될 것이다.


4. 나오며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에서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16-17세기 이전에는 서양의 지배계층 조차도 아동기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고, 20세기에 들어서도 하층민들에게는 아동에 대한 의식은 없었다. 근대에 이르러서 아동에 대한 인식이 인격적인 존재로 보았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 방정환이 『어린이』지를 창간하면서부터 아동의 존재를 인격적인 존재로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동문학의 경우 아동을 인격적인 존재보다는 동심으로 미화시켜 자신의 명리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지나 않았나. 뒤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양심 있는 동시인 이라면 시적 표현 기능 신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리적 가치 실현하기 위해 동시인, 아동문학에 뛰어든 사람이 있다면, 이는 어린이를 존재를 이용하여 자신의 허명의식을 채우려는 하이드일 것이다. 이는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명리적 가치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비굴한 행동일 것이며, 미래 성인의 축소판 문화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에 동참할 개연성이 상존하게 된다.
  오늘날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사회현실 속 멍든 동심을 동시로 치유하고 인간다움의 정서를 환기 시켜 위안을 주는 시 한 편을 떳떳하게 선물할 수 있는 어린이 사랑을 실천할 때다.
피상적으로 동심의 겉모습만을 보고 어린이 세계를 미화하는 동시로는 어린이들의 정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동심과 동시의 개념을 바로 알고, 동시 창작만에 힘쓰기보다는 그에 앞에서 시창작 기법 익히기를 병행함으로써 전문적인 동시인으로 거듭나는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남도문학>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