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묵상/마 10:39-42)
◆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핍박 받을 때, 육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영원한 죽음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육신의 목숨이 최우선순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더 좋은 곳으로의 장소 이동이며, 정든 사람과의 짧은 이별이 슬프지만, 반면에 주님과, 과거에 알았던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 말씀은 꼭 핍박의 현장에서만 적용되는 것만이 아니다. 성도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다.
말기 암에 걸린 내 친구는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병은 큰 근심을 가져왔고 마음은 늘 우울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사화복을 다 주님의 손에 맡기자 그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찾아왔다. 왜 그렇게 살려고만 애를 썼는지...
그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자 비로소 깊은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암이 치료되어 7년을 더 살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우울해하거나 건강 염려증에 빠져서 지내는 것은 믿음의 모습이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십자가의 대속을 묵상하자. 거기에 우리의 희망과 평안이 있다.
◆ 하늘의 상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로 사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일깨우신다.
하나는 제자들과 주님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돕는 사람들은 곧 주님을 돕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주님께서 잊지 않고 보상해주신다고 하신다. 심지어 물 한그릇같이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갚으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나처럼 부족하고 허물 많은 자를 이런 연합의 관계로 선언하시는 것이 얼마나 황송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내가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우시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선지자, 의인, 제자들 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돕는 것을 주님께서는 결단코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신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42)라는 말씀은 이들이 설사 인격적으로 부족할지라도, 혹은 그의 사역이 지극히 사소해보여도 그런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제자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도와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을 돕자.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된 일이다. 내가 주님의 제자니까 나는 도움만 필요하지 남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지 말자. 오히려 제자된 자들은 더욱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해야 한다. 주님께서 얼마나 어려운 자들을 많이 도우셨는가?
다만 헌금은 눈먼 돈이 아님을 명심하고 올바른 곳에 제대로 분별해서 드리자.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께 보상받을 수 있는 지혜롭고 복된 투자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42)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이 얼마나 감사하고 확실한 약속의 말씀인가!
주님, 우리를 주님과 연합의 관계로 보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제자의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로하여금 사역자들을 돌아보며 힘써 돕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일깨워주십시오.
오늘로서 시편 씨리즈 네번째 설교 말씀을 드립니다. 때를 맞추어서 저의 친구 중 시인이 있는데 시낭송에 대한 동영상을 얼마전 보내 왔습니다. 시편 말씀을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략 중요한 점을 다시 말씀드리면, 시를 낭송할 때는 시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해야 하고, 시의 배경은 물론이고 시인의 삶까지…. 그리고는 자신의 것으로 시를 소화한 후 낭송을 할 때 시는 새롭게 만들어져서 듣는 이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음악 감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작곡가의 생애를 이해할 때 음악 감상에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일반화된 상식인줄 압니다.
이를 시편의 편집자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시편의 시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표제어는 제일 위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시의 배경 내지 시인을 소개하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편 3편의 표제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사실 지난주는 광복절 기념 주일이기에 87편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시편 3편을 나눕니다. 시편 150편 중에 앞으로 몇 편을 나누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편 3편을 꼭 나누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전 말씀드린대로 시편 1, 2편은 시편의 도입부입니다. 서론이라고 할까요? 시편의 도입부를 지나 첫번째 시가 바로 3편입니다. 그러니 3편의 의미가 큽니다. 어떻게 보면 시편의 첫번째 시라고도 생각할수 있습니다. 시편 편집자들은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148편 중에 오늘의 시를 시편 전체로는 세번째로, 도입부 이후로는 첫번째로 편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표제어만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편 23편 같은 시는 한참 뒤로 미루고 생뚱맞은 시로 시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왜 시편23편등 잘 알려진 시편은 뒤로 미루고 잘 알려지지 않은 3편을 제일 앞에 놓았을까요? 사실 표제어를 통해서 편집자들의 의도를 짐작할수 있다고 봅니다.
이 시의 배경은 표제어에 나타나 있듯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나고 있을 때입니다. 압살롬은 아들인데 아들에게 쫓겨서 달아나고 있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이 할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기도.’ 기도뿐이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시편 편집자들에게는 시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기도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기도문인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찬양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찬양 가운데 기도가 스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찬양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둘은 궁극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오래전 어느 신학 교수님으로부터 본인의 책을 선물 받은적이 있습니다. 책 제목은 ‘기도의 정석’이었습니다. 아주 알찬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문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편집자들은 시편 편집을 위해 기도의 정석이라고 생각하는 시를 찾았을 것입니다. 3편을 기도의 정석으로 꼽은 것입니다. 아들에게 쫓기는 다윗의 기도에서 기도의 정석을 찾아 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편이 도입부를 지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시를 통해서 기도의 정석은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2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기도의 정석의 시작은 이처럼 곤궁에 처한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주는 멧세지는 놀라운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주님, 큰 일 났습니다” 외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외침 없이는 기도는 시작이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외치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쫓기는 다윗처럼….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 두 분이 만나서 ‘믿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믿음은 번지 점프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절벽에 서 있는 것입니다.’
두 분 모두 “주님, 큰 일 났습니다” 외치고 또 외쳤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반문하실수도 있습니다. “두 분 다 대형교회를 이루었지만 본받기 어려운 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윗도 매한 가지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가게 된 이유는 11년전에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아내들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들 압살롬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윗도 당연히 지난날에 과오로 인한 벌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과오는 이미 회개했습니다. 11년전에…. 그래서 다윗은 다시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회개는 했습니다. 다윗이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주님, 큰 일 났습니다. 살려주세요.”
이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정석은 어떻게 진행이 될까요? 3, 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다윗은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그러면 다윗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다윗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빠져 나와 도망치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압살롬이 자기를 쫓아 와서 죽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왕권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생각이 들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랍게 응답하십니다. 다윗이 받은 응답은 무엇일까요?
곧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받게 되었을까요?
다시 다윗의 오래전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기 전이었습니다. 다윗은 착한 마음이 들어서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는 마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전했습니다. 나단이 다음 날 찾아 와서는 놀라운 말씀을 전해 줍니다. 사무엘하 7: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이는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12절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이는 두 가지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솔로몬을 세우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솔로몬의 영화를 말씀하시고 계시고 한편으로는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위기 가운데서 도리어 11년 보다 더 전에 약속하신 그 약속을 다시금 마음 속에 되새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곧 기도의 두번째 정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편안히 잠이 듭니다. 5, 6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저도 간혹 잠이 잘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다시 하루 생활을 뒤돌아 봅니다. 혹시 염려했던 것이 있나…? 많은 경우 찾아 냅니다. 염려했던 것을 회개하면 금방 잠이 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두번째 정석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윗처럼 구체적인 약속을 받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세번째 정석은,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눕니다. 제1언어, 2언어, 3언어. 제 1언어는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배고파 순두부 해 줘.”
2언어는 정보의 언어입니다. “오늘 메뉴는 순두부야.”
3언어는 유도하는 언어입니다. “나는 순두부가 제일 맛있는데….”
이 중 기도의 언어 및 시의 언어는 제1언어뿐이라는 것입니다.
“배고파 순두부 해 줘.”
7절의 시작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조금 바꾸면,
“아빠 큰일 났어 빨리 일어나.”
제1언어를 쓰면 쓸수록 신비스럽게 확신이 생깁니다. 온갖 정보로 머리 속에 넣는다고 확신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가 막히게 유도한다고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엄마 배고파 순두부 해줘.”
이 고백이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세번째 기도의 정석은 제1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할레스비는 ‘기도’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부를 때 하늘에서 긴장하시고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제1언어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정석을 정리해 볼까요?
첫번째는 곤궁에 처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Issac Bashevis Sing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곤궁에 처했을 때만 기도드린다. 그런데 나는 항상 곤궁에 처해 있다. 그래서 항상 기도드린다.
두번째는 약속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날이 어제 보다 하루 더 가까워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언제나 제1언어의 위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엄마 배고파 순두부 해줘.”
순두부에다가 불고기가 덤으로 나올 것입니다. “순두부가 제일 맛 있는데” 유도의 언어를 사용할 땐 불고기가 안 나옵니다.
다윗은 상상할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큰 일 난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온 세계를 축복하였습니다. 왕의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개인을 위한 기도로 시작해서 온 백성을 위한 기도 왕의 기도로 마친 것입니다.
그는 기도의 정석을 오고 가는 세대에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하바드 의대 교수로 봉직하시는 김광수 교수님이 계십니다. 최근 만능줄기세포를 만들어 파킨슨병 환자에게 이식하여 치료에 성공하신 분이십니다. 2년전 처음 시술을 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환자는 상태가 양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불우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교수님의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해서 극빈자 수준으로 살았고 친구도 없고 우울한 기가 죽어 있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는데 고등학교 때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하십니다.
“어느날 교회 친구들과 함께 심야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공부를 계속하고 과학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렸다.”
20년후 보스톤에 오게 되고 그후 20년이 지나서 이제는 파킨슨병 치료에 획을 긋는 성과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는 또 다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돌이켜보니 20년 전 보스톤으로 오면서 드렸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의 부족한 연구가 많은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 수 있게 해 주십시요.”
어느덧 교수님의 기도는 개인의 기도에서 공동체의 기도로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편은 개인적 신앙생활을 강조한다면 2편은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강조한다고…. 모든 시편은 이 두 시편 사이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시편에는 개인적인 기도의 제목으로 시작되지만 공동체적 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시도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놀라운 삶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늘 곤궁에 처해 있음을 아는 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늘 곤궁에 처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아버지”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찬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일을 매일 매일 감당하시는 것일줄 압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관계에서 [화평]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을 필수적으로 추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면을 넘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수적인 성도의 삶의 방식이자 연단 과정입니다.
Bible.com +5
핵심 의미와 실천:
화평함 (Peace):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형제들과 화목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거룩함 (Holiness):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자로서, 세상의 부정함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좇으라 (Pursue): '화평과 거룩'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과 인내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힘써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징계와 연단이 올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거룩과 화평을 이룸으로써 영적 침체를 극복하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메시지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정말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적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 나는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많이 가졌거나 빈손이거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찾았습니다.
-----------------------------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제라도 다시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말해 놓고 보니 왠지 좀 그랬나봅니다. 자신이 지금 궁핍해서 매우 힘들어하는 것으로 오해할까봐 말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족이란 외적 상황에 관계 없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래도 일단은 부족한 것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이겠지요.
아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데만 힘을 쓴 바울은 그리 넉넉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는 등 육체적인 고난도 많이 당했고 자신을 핍박하는 외부 세력과 반대하는 내부 세력에 의해 정신적 고난도 많이 당했지요.
그런데도 만족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궁핍이나 비천함뿐 아니라 '풍부와 배부름에도 처할 줄 알았다'는 말은 자족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려움을 이기는 데만 쓰이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졌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지요.
바울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난한 상태에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만족하며, 풍부한 상태에 있더라도 그것에 지배당하거나 매이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매였던 것이지요. 그런 상태가 진정한 '자족의 상태'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게 위로를 주는 것은 바로 '배웠다'는 단어입니다. 대사도인 바울조차 그런 자족의 상태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훈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오랜 교제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니까요.
사실 우리는 늘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명예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기가 쉽지요.
하지만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을 매순간 기억하고, 그 무엇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더 깊이 맛보게 된다면, 조금씩 자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