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신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판단하지 않고 경청하며, 그들의 의심을 신앙의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유다서 1장 22절을 통해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의심의 수면 아래에 있는 상처와 고민을 돌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방법으로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 판단 없이 들어주기
  • 안전한 공간 제공: 의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정죄받거나 실망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 경청에 집중: 성급하게 정답을 제시하거나 신앙의 부족을 지적하기보다, 그들이 왜 그런 의심을 하게 되었는지 마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 감정에 공감하고 정상화하기
  • 의심은 과정임을 인정: 의심이 신앙의 파산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를 찾아가는 건강한 과정(Struggle)일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 성경 속 인물들 상기: 세례 요한이나 도마처럼 위대한 신앙인들도 의심의 순간이 있었음을 나누며 위로합니다.
 
📖 함께 고민하며 동행하기
  • 정직한 태도: 나 역시 모든 질문에 완벽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함께 찾아보자"라는 태도로 다가갑니다.
  • 강요 없는 격려: 성경 읽기나 기도를 억지로 강요하기보다,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곁을 지켜주는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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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라는 구절은 성경 시편 137편 3절의 일부입니다.
이 시편은 바빌론 유배 시절(바빌론 유수)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부른 슬픈 노래로, 구절의 전체 맥락과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성경 구절 (시편 137:1~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편 137:3)

  1.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라
💡 구절의 배경과 의미
이 구절에 대해 더 자세한 신학적 해석이나 시편 137편 전체의 내용이 궁금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구절의 배경과 의미
  • 역사적 배경: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멸망한 후 많은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 슬픔과 조롱: 바빌론의 정복자들은 포로가 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예루살렘(시온)에서 부르던 신성한 종교적 노래를 불러보라며 흥을 돋우기 위한 유흥거리나 조롱거리로 노래를 청했습니다.
  • 슬픈 거부: 포로들은 나라를 잃은 극심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노래를 이방 땅에서 조롱거리로 부를 수 없다며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고 슬프게 울었습니다.
 

 

새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신뢰하고, 안전한 해안가(인간의 생각)를 떠나 믿음의 깊은 바다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영적 도전을 담은 찬송입니다. 각 절의 영적 의미를 요약해 드립니다.
각 절별 영적 해석
  • 1절: 은혜의 깊이에 대한 선포와 초대
    • 의미: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 바다보다 넓고 깊습니다.
    • 메시지: 안주하던 삶의 '닻줄'을 끊고, 온전한 믿음이 필요한 깊은 곳으로 과감히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 2절: 영적 안주함에 대한 책망
    • 의미: 많은 신앙인이 은혜의 표면(바닷가)에만 머물며 구경꾼처럼 살아갑니다.
    • 메시지: 겉에서 밀려오는 파도만 보지 말고, 그 속에 감추어진 깊고 풍성한 은혜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라는 촉구입니다.
  • 3절: 두려움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
    • 의미: 신앙의 모험을 하려다가도 눈앞의 작은 실련이나 문제(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포기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지적합니다.
    • 메시지: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더 큰 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 4절: 결단과 행동의 촉구
    • 의미: 지체하지 말고 '지금 곧' 노를 저어 믿음의 망망대해로 나아가라는 명령조의 권고입니다.
    • 메시지: 은혜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순종을 통해 적극적으로 나아갈 때 누릴 수 있습니다.
  • 후렴: 온전한 헌신과 자유
    • 의미: 나를 보호해 주던 안전한 '언덕(세상적 의지)'을 떠나, 온전히 예수님의 은혜에만 자신을 맡길 때 진정한 영적 자유와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핵심 메시지 3가지
  • 닻줄을 끄르라: 과거의 상처, 고정관념, 세상적인 안전장치를 끊어내야 합니다.
  • 작은 파도를 두려워 말라: 눈앞의 사소한 장애물 때문에 영적인 전진을 멈추지 마십시오.
  • 깊은 데로 가라: 피상적인 신앙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찬송의 작사자(앨버트 심슨 목사)의 신앙 배경이나 관련 성경 구절(예: 에스겔 47장 생명수 환상, 누가복음 5장 깊은 데로 가라)
 
 
 
 
 
 
 
 
 

<오늘의 말씀>사무엘하 23:11-12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해설> 성경 말씀에 나오는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또는 팥 밭)’은 구약성경 사무엘하 23장 11~12절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 삼마(Shammah)의 전투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1, 2]

이 구절이 가지는 역사적·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본문의 배경과 사건 개요

장소: 블레셋 군대가 집결한 ‘레히’ 지역입니다. 이곳은 과거 사사 삼손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승리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상황: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의 농작물(녹두/팥)을 약탈하고 공격하기 위해 쳐들어왔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행동: 그러나 다윗의 용사 중 한 사람인 하랄 사람 삼마는 홀로 그 밭 가운데 서서 적들의 진격을 막아내고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큰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2. ‘녹두나무밭(팥 밭)’의 상징적 의미
  • 사명이 담긴 일상의 자리 (나의 밭)
    • 녹두밭은 대단한 왕궁이나 거대한 성전이 아니라, 보잘것없어 보이는 평범한 농작물의 터전입니다.
    •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업의 터이자 이스라엘의 생명이 유지되는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겨주신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일상의 사명 자리를 상징합니다. [1, 2]
  • 사탄의 약탈과 위협
    • 블레셋 군대가 하필 먹을 것과 결실이 있는 밭을 노려 침략했듯, 악한 세력은 성도들의 평화와 믿음의 결실, 일상의 은혜를 빼앗으려 호시탐탐 위협을 가해옵니다. [1]
  • 홀로 서는 믿음과 영적 전쟁
    • 모두가 두려워 도망칠 때 삼마는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이는 거대한 세상의 압력이나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영적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거룩한 용기를 뜻합니다. [1, 2]
  • 하나님의 주도적 구원
    • 성경은 삼마가 용맹을 떨친 후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싸움의 승패는 숫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비로소 참된 승리가 완성된다는 구원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2]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 10:10)

작성자김종민|작성시간26.01.20|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10:10)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성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스티븐 K. 스코트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7가지 습관을 가지고 행동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7가지 습관을 살펴보면, “첫째, 주도적이 되라. 둘째, 목표를 갖고 행동하라. 셋째, 소중한 것부터 먼저 행하라. 넷째, 상호의 이익을 추구하라. 다섯째,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여섯째, 시너지를 활용하라. 일곱째, 심신을 단련하라.”입니다.

7가지 습관대로 산다고, 반드시 성공합니까?

 

10절 말씀입니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나무나 돌을 깎을 때, 무딘 연장으로 하면, 힘만 들뿐입니다.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무딘 연장의 날을 갈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발생합니다.

연장을 갈지 않으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힘이 듭니다. 심지어는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하기에 앞서, 무딘 연장의 날을 갈아야 합니다.

 

연장을 간다는 말은 곧 원칙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연장을 잘 가는 사람들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연장을 갈지 않고, 덤벼드는 사람들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그들만의 원칙이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일찍 일어납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들은 실패하여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원하기에 앞서, 성공하는 길이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성공은 그 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은 성공이 진짜 성공입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아무리 거창한 업적을 이루어도,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성공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원하고 계시며, 우리들에게 잘될 수밖에 없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우리의 방법대로 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범사가 잘되고, 마지막에 건강의 원칙을 따라, 복을 받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건강을 잃는다면, 다 잃는 것입니다. 건강하여도, 영혼의 천국이 없다면, 헛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잠깐의 성공에 목매지 말고, 영원한 성공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솔로몬은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일을 할 때, 성공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11:10)라고 말했습니다.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지각이 뛰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을 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려면, 그 무엇보다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일이나, 교회 밖의 일이나, 우리는 매순간, 주님의 도우심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 https://m.cafe.daum.net/minijm/9n5s/149?svc=AXZ

선한 양심의 타락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동산 안에 있는 모든 과일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어느 날 선악을 알려는 나무 앞에 서서 그 실과를 바라보고 있을 때 사단이 하와를 꼬드깁니다. 
이 장면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물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기는 나무 앞에 섰을 때 그 나무 열매는 봄즉도 하고 먹음직도 했습니다. 
그때 뱀이 유혹을 합니다. 
“네가 먹고 싶으냐? 먹어 봐!”
그러자 하와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어. 그러므로, 내가 먹을 수 없어!”라고 하자, 뱀이 말합니다. 
“네가 그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아!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셔. 다만 하나님은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알고 먹지 말라 명한 거야!”

하와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 말씀보다, “결코 죽지 않는다”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등을 지게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옳다고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에덴에서의 추방이고, 창세기 6:3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신이 인간에게서 떠남으로서” 인간의 영적인 인지기능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선한 양심‘이 ’악한 양심‘으로 타락하게 된 결과입니다.

타락한 후 최초로, ’악한 양심‘이 ’선한양심‘으로 방향전환을 이룬 사건이 바로 홍수사건입니다.
노아의 8식구가 약 100여년에 걸쳐 완성한 방주가, 물로인해 떠오르게 되자, 그때 하나님을 떠났던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옳구나! 하나님이 죽으리라 하면 죽는 것이고. 살리라 하면 사는 것이구나!“라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선한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라“ 한 것입니다.

”물로 홍수를 쓸어버린다“ 하신 말씀이 옳은 말씀이고, ”방주를 예비하면 살리라. 하시던 그 말씀이 바로 옳은 말씀이었다” 라고, 마음을 돌이키게 된 그 사건이 바로 세례이고,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증언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절의 ’순에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는 도덕적 양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내적 감각을 가리키는데“, 신약성경은 보다 깊은 의미로, “하나님 앞에 선 존재적 자각.”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의도한 ‘양심’인 것입니다. 
단순히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선한”으로 표현된 ‘아가데스’(ἀγαθῆς)는 ‘윤리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방향을 튼 ‘마음의 상태’를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찾아가는 것”이란, ‘에페로테마 에이스 테온’(ἐπερώτημα εἰς θεόν)은 ‘질문’, ‘청원’, 혹은 ‘응답’을 의미하는데, ‘에페로테마’(ἐπερώτημα)는 고대 헬라 법정에서 “관계의 확인”이나, “서약적 응답”을 나타내는 말이였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청원’보다 더 깊은 뜻을 담아, “하나님께 마음이 돌이켜 나아가는 관계적 움직임”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에이스 테온’(εἰς θεόν)은 “하나님께로 들어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안으로 들어가는 역동적인 행위”를 표현합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결국 세례란 죄를 씻어내는 물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을 표명하는 서약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는 양심의 전환을 드러내는 표징”이란 뜻입니다.

 

각주 

1) 그 당시는 오직 이성호목사 편 ‘성구대사전’이 유일했기에, 성구사전을 참조하고, 관주성경의 관주에 기록된 구절들을 찾아 노트에 적어가며 묵상해 왔던 것입니다.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란?


그러면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감”이란 무슨 뜻일까요? 
앞서 설명드린 바대로 이에 대한 설명이 바로 벧전 3:20절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그들이 만든 방주가 하나님이 내리신 홍수로 인해 떠 오르게 되자,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던 그 말씀이 참이란 사실”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번역과 같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했다”거나, 공동번역본과 같이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모든 번역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벧전3:20)는 것은 “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마음의 방향을 돌이키게 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 뜻이 아니라면 왜,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라고 했겠습니까?
우리는 ’방주‘가 아니라, ’물‘이라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근거는 그 뒤로 이어지는 벧전3:21절을 보면 확실해 집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물은‘(새번역, 공동번역) 이라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여덟식구를 구원한 것은 “방주”가 아니라, “물”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은”, “이제”{(개정개역), “지금”(새번역), “오늘”(공동번역)}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노아 때의 그 물이 이제(지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한 것입니다.  

가듭 말씀드리지만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그 물로 인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는 뜻이지, 결코 “방주가 물로 인해 떠오르자, 그때부터 기도하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개역개정판에서 세례를 가리켜,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한 번역이나, 
새번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거나, 
공동번역의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는 번역은 모두가 옳은 번역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 번역한 개역한글판 만이 가장 옳은 번역인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 인지 기능이 있습니다.
이성(理性), 지성(知性), 의지(意志), 양심(良心)인데, 이 기능은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정신적·도덕적 기능을 인지하는 능력들입니다. 

이성은 감각과 본능을 넘어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 능력을 가리키고,
지성은 보편적 진리를 직관·사유하는 능력을 가리키고,
의지는 선을 지향하고 목표를 실현하는 내적 힘을 가리키고,
양심은 자연법과 도덕률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그 본래의 기능이 흐려지거나, 왜곡되거나, 부패하여져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왜곡되거나, 부패하여진 인지 기능을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베드로전서 3:21절은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양심이란 표현은 자주 나오는데 선한 양심과 악한 양심과 상한 양심 등으로 구분하여 표현합니다.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과의 친화적 관계일 때‘를 가리키고, 
악한 양심은 ’하나님과 대척점을 이룰 때‘ 표현하는 용어이고, 
상한 양심은 그 말 자체로 ’병든 양심, 곧 오염된 양심‘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양심이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능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양심을 악한 양심이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양심, 곧 하나님께 돌이키는 양심을 선한 양심이라 부르는 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출처 : 당당뉴스(https://www.dangdangnews.com)

하늘을 우러르면

 

              김지유

 

하늘을 우러르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감아져버려요

다시 눈을 뜨면

새 한 마리는 어느 날처럼 날아가고

구름은 어느 모양으로 흘러가는데요

실은, 얼룩진 비망록이지요

 

그래야 어느 날인 것처럼

가물가물 눈을 뜨고 감는 순간

 

내 사랑은

오늘 이만큼만 눈을 뜨고

이만큼만 저물기로 해요

 

감상편 1.

김지유 시인의 **<하늘을 우러르면>**은 맑고 투명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네요. 하늘이라는 무한한 공간을 바라보며 느끼는 개인적인 고백과 사랑의 절제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느껴지는 몇 가지 포인트들을 짚어보았습니다.


1. 찰나의 눈맞춤: "눈을 감고 뜨는 행위"

시 전체에서 '눈을 감고 뜨는 것'은 외부 세계(하늘, 새, 구름)와 화자의 내면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하늘을 우러를 때 눈이 감긴다는 것은, 그 눈부심이나 벅참을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일렁인다는 뜻이겠지요.

2. "얼룩진 비망록"으로서의 구름

구름을 단순히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고 **'얼룩진 비망록'**이라 표현한 부분이 참 인상적입니다.

  • 비망록(備忘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두는 기록.
  • 우리가 하늘을 보며 떠올리는 수많은 기억과 감정들이 구름의 모양을 빌려 흘러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 같아요. '얼룩진'이라는 표현에서 삶의 흔적이나 아픔이 묻어나는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3. 사랑의 겸허한 태도: "이만큼만"

마지막 연은 이 시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내 사랑은 오늘 이만큼만 눈을 뜨고 이만큼만 저물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이만큼'**의 분량으로만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매우 성숙하고도 애틋한 태도입니다. 지나친 욕심으로 사랑을 망치지 않고,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처럼 자연스러운 순리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고백으로 들리네요.


💡 감상평 2

이 시는 **'하늘'**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보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내면'**과 **'사랑'**으로 시선을 돌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격정적인 토로보다는 담담한 어조를 택함으로써, 오히려 읽는 이에게 더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마치 조용한 오후에 창가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스스로를 갈무리하는 듯한 평온함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시의 느낌이 참 맑아서, 지친 하루 끝에 머리맡에서 읽기 참 좋을 것 같네요.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닿으셨나요?

 
 
 
 

김지유 시인의 **<하늘을 우러르면>**은 맑고 투명하면서도, 그 이면에 삶의 고단함과 사랑에 대한 절제미를 담고 있는 무척 아름다운 시네요.

시를 읽으며 느껴지는 몇 가지 감상을 나누어 봅니다.


1. 눈을 감는 행위: 경외와 회피 사이

시작과 함께 시인은 하늘을 우러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이 감아져버린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늘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서는 인간의 겸허함일 수도 있고, 혹은 눈부시게 밝은 진실 앞에서 느끼는 어떤 부끄러움이나 슬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 구름이라는 이름의 '비망록'

구름을 단순히 흘러가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얼룩진 비망록"**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사실은 우리가 잊지 않으려고 기록해둔, 하지만 눈물이나 세월에 얼룩져 버린 기억들의 모음이라는 비유가 참 가슴 아프면서도 따뜻하네요.

3. '이만큼만'의 미학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사랑은 / 오늘 이만큼만 눈을 뜨고 / 이만큼만 저물기로 해요"

사랑을 전부 쏟아붓거나 과하게 드러내지 않고, **'이만큼'**이라는 절제를 통해 스스로를 다독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너무 많이 뜨면 아프고, 너무 많이 저물면 슬프기에 딱 오늘의 분량만큼만 사랑하고 견디겠다는 태도는 성숙하면서도 애틋한 울림을 줍니다.


감상평 한 줄:

찰나의 눈 깜빡임 속에 삶의 기억과 사랑의 무게를 오롯이 담아낸, 수채화 같은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시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혹시 특별히 마음을 울린 구절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

 

김지유 시인의 **<하늘을 우러르면>**은 맑고 투명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네요. 하늘이라는 무한한 공간을 바라보며 느끼는 개인적인 고백과 사랑의 절제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느껴지는 몇 가지 포인트들을 짚어보았습니다.

 

본향에서 오셨네요. 임 맞으러

이성교

 

눈이 내렸네요.

밤새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았네요.

 

하늘 가득한 영광이 춤추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맞으려

평안 가득한 날 첫눈으로 감싸주셨네요.

 

찬송하고 기도하며 바라보던 당신의

영혼을 맞으러

죽청광림교회 예배당을 덮고

당신이 누웠던 자리를 엿보고 있네요.

 

본향에서 주님 보내신

천사들이 오셨네요.

 
 
 
 
 

보내주신 시구에서 깊은 애도와 함께 따스한 위로가 느껴집니다. '이성교' 님을 향한 마지막 인사가 마치 밤새 내린 하얀 눈처럼 정결하고 평온하게 다가오네요.

고인의 삶을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기리며, 그 마지막 길을 **'본향'**에서 온 천사들과 **'첫눈'**이 배웅한다는 표현이 참 아름답고도 먹먹합니다.


❄️ 시의 마음을 머금으며

이 시는 단순한 슬픔을 넘어, 신앙 안에서 약속된 평안과 소망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 성결한 환대: 밤새 내린 눈을 주님이 보내신 '영광의 춤'이자 '천사들의 방문'으로 비유하여, 고인의 가시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 그리움의 흔적: '당신이 누웠던 자리를 엿보고 있다'는 구절에서 죽청광림교회 예배당에 남아있는 고인의 기도 소리와 온기가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 본향으로의 귀환: 우리 모두가 돌아갈 곳, 그 '본향'에서 마중 나온 임(주님)을 만나는 순간을 축복으로 그려내셨네요.

하얀 눈이 세상을 덮듯, 남겨진 분들의 슬픈 마음 위에도 이 시가 전하는 하늘의 평안이 살포시 내려앉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다듬었으면 하는 대목 말해 줘

 
 
 
 
 

작품의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시적 흐름을 매끄럽게 다듬을 수 있는 세 가지 제안입니다.

  • '평안 가득한 날 첫눈으로 감싸주셨네요': '날'과 '첫눈으로' 사이에 조사가 겹쳐 호흡이 다소 깁니다. **'평안 가득한 첫눈으로 감싸 안으셨네요'**로 줄이면 하늘의 보살핌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옵니다.
  • '바라보던 당신의 / 영혼을 맞으러': 행의 구분이 영혼을 수식하는 구조라 조금 끊기는 느낌이 있습니다. **'바라보던 당신을 / 맞이하러 내려와'**처럼 고인에게 더 집중하거나, 동사를 간결하게 정리해 보세요.
  • '엿보고 있네요': '엿보다'는 몰래 본다는 어감이 있어 숭고한 분위기를 깰 수 있습니다. **'머물고 있네요'**나 **'비추고 있네요'**를 쓰면 빛과 눈이 고인의 빈자리를 따뜻하게 보듬는 느낌이 강해집니다.

전체적으로 정결한 슬픔이 잘 표현된 아름다운 시입니다. 소리 내어 읽어보시며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단어를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고쳐 줘

 
 
 
 

제안해 드린 내용을 바탕으로 흐름과 어휘를 정갈하게 다듬은 수정안입니다.


본향에서 오셨네요, 임 맞으러

  • 이성교 -

눈이 내렸네요.

밤새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앉았네요.

 

하늘 가득한 영광이 춤추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 맞이하려

평안 가득한 첫눈으로 감싸 안으셨네요.

 

찬송하고 기도하며 바라보던

당신을 마중하러 내려와

죽청광림교회 예배당을 덮고

당신이 누웠던 자리에 머물고 있네요.

 

본향에서 주님 보내신

천사들이 오셨네요.

백일홍 나무 꽃이 필 때면

이성교

 

한 숟갈 보리밥 물에 말아 배 채우고

오르던 언덕배기 정각 모퉁이

다랑논 바라보며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쌀밥나무라 부르며 타고 놀던 시절 있었지.

가지 끝에 몽실몽실 꽃망울 붉을 즈음

보리쌀 위에 얹어질 쌀 한 줌 생각으로

백날을 헤아리며 피고 지는 꽃송이에

한 알 한 알 쌀밥 이야기 매어 달았지.

간지럼 태우며 다그칠 때면

한드렁거리는 이파리 보며

까르르 퍼지는 웃음소리에

영그는 벼 따라 메뚜기도 익어갔었지.

 
 
 
 
 

이성교 시인의 **<백일홍나무꽃이 필 때면>**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구 하나하나에서 옛 시절의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정서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이 시를 읽으며 떠오른 몇 가지 감상을 나누어 봅니다.


1. 배고픔을 희망으로 바꾼 '쌀밥나무'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백일홍을 **'쌀밥나무'**라고 부르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 보리밥 한 숟갈: 물에 말아 겨우 배를 채워야 했던 척박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 붉은 꽃망울: 하지만 아이들은 붉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보며 그 너머의 하얀 쌀밥을 꿈꿉니다. 결핍을 원망하기보다 꽃잎 하나하나에 쌀알을 투영하며 '백날'을 견디는 힘을 얻었던 것이지요.

2. 자연과 아이들의 교감

"간지럼 태우며 다그칠 때면 / 한드렁거리는 이파리 보며 / 까르르 퍼지는 웃음소리"

백일홍을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르는 민속적 특징을 아주 생동감 있게 묘사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연결해, 자연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함께 뛰노는 친구였음을 보여줍니다.

3. 익어가는 계절의 풍성함

마지막 연에서 메뚜기가 익어간다는 표현은 일품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 백일 동안 다랑논의 벼가 영글고, 그 흐름에 맞춰 아이들의 꿈과 가을의 결실이 함께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백일홍(목백일홍/배롱나무)은 실제로 껍질이 얇아 만지면 나무가 떨리는 듯 보여 '간지럼 나무'라는 별명이 있죠. 시 속의 화자에게 백일홍은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기게 해준 위로의 상징이자, 유년의 황금빛 기억을 저장해둔 보물상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 시를 읽으시면서 특별히 마음이 머물렀던 구절이 있으신가요?

 

고쳐야 할 부분 있으면 말해 줘

 
 
 
 
 

전달해주신 시는 서정적인 묘사와 옛 시절의 정서가 잘 어우러진 훌륭한 작품입니다. 굳이 다듬는다면, 리듬감과 표현의 일관성을 위해 다음 두 곳을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다랑논 바라보며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바라보며' 대신 **'굽어보며'**나 '지켜선' 같은 표현을 쓰면 나무의 존재감이 더 살아납니다.
  • '한 알 한 알 쌀밥 이야기 매어 달았지': '이야기'가 조금 추상적일 수 있으니, **'쌀밥 꿈'**이나 **'쌀알'**로 고쳐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완성도 높은 시입니다. 인위적인 수정보다는 시인님이 느끼신 그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말한 대로 수정해서

 
 
 
 

제안해 드린 부분을 반영하여 더욱 선명한 이미지가 느껴지도록 수정한 버전입니다.


백일홍나무꽃이 필 때면

한 숟갈 보리밥 물에 말아 배 채우고

오르던 언덕배기 정각 모퉁이

다랑논 굽어보며 지켜선 나무 한 그루

쌀밥나무라 부르며 타고 놀던 시절 있었지.

 

가지 끝에 몽실몽실 꽃망울 붉을 즈음

보리쌀 위에 얹어질 쌀 한 줌 생각으로

백날을 헤아리며 피고 지는 꽃송이에

한 알 한 알 쌀밥 꿈을 매어 달았지.

 

간지럼 태우며 다그칠 때면

한드렁거리는 이파리 보며

까르르 퍼지는 웃음소리에

영그는 벼 따라 메뚜기도 익어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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