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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돌문학관/수필

소리의 위력

루스드라 2021. 12. 16. 17:19

(화순예술지 원고)

소리의 위력

이성교

 

  우리는 가끔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쓴다. 그것은 말 즉 소리의 위력을 나타내는 속담이다. 말은 자신이 먼저 듣고 마음에 씨앗이 되어 자라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말은 좋은 씨앗이 되고 부정적인 말은 좋지 않은 씨앗이 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듣고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오래전에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부르짖는 기도라는 책을 읽었다. 작가의 체험을 중심으로 쓴 1권에서 말하는 중심내용은 기도는 성경의 명령이며 약속이다. 부르짖음에서 하늘의 구원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문제가 있을 때면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망하는 사람들은 부르짖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소리는 그냥 울림이 아니고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부르짖는 사람의 특성은 대부분 걱정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평안한 마음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순히 어린아이처럼 원시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성령님이 오셔서 피할 길을 알게 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맡기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기 때문에 근심 걱정과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증표이다. 인생의 벼랑에 선 사람은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 그래서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지은 죄를 통회 하는 심령을 찾아오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심령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낮고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겸손함을 드러내는 자기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애통한 심령을 눈물로 하소연하며 티끌같이 낮아져서 땅바닥에 바싹 엎드려지게 된다. 그래서 상한 심령, 통회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잘못된 부르짖음은 효력이 없다. 부르짖는 기도는 외적 표현일 뿐 내적 동기가 진실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하나의 소음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정화되지 않은 소리로 매우 듣기가 싫다. 그러므로 부르짖는 기도를 배우고 경험하여 하늘 문을 움직이는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분별해야 한다.

  소리는 구원의 시작이며 은총의 시작이다. 그리고 능력의 시작이다. 먼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 말씀대로 구원에 이르려면 입으로 시인을 해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혼에서 소리가 울려 보이는 입에서 소리가 되어 나온다. 그래서 입으로 고백할 때 개념이 실제가 되어 모든 삶이 바뀌게 된다. 또한 입을 열고 소리를 낼 때 우리는 물질적인 은총을 얻을 수 있다.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질병이 있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고 통증을 완화해 주기도 하신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어 기도하지 않으면 통증이 더욱 심해진다. 이처럼 소리를 절제하는 것은 은혜를 막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다.

  소리는 보이는 기도이며 들리는 기도이다. 그것은 물질을 진동시켜서 물질계에 영향을 준다. 즉 그 내용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할 때 생생히 살아있는 실제가 된다. 그래서 소리를 내면 낼수록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입술로 선포한 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공중을 맴돌면서 새롭게 재생산되고 확대되며 그 힘이 강해진다. 그것이 소리의 위력이다.

  소리는 기도할 때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모든 말에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대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사랑과 신뢰와 희망과 감사에 대한 고백과 시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소리는 사람을 움직이고 거대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그래서 마귀들은 소리를 무서워한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소리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너무 소리가 없다고 한다.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는 즐거운 소리의 화음이 있으며 살아있는 곳에서는 움직임이 있고 소리가 있다. 그래서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은 조용하지 않다. 노인은 생명이 시들어 가고 있으므로 조용하게 지내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어린이들이 있는 곳은 시끄럽고 생동감이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소리의 공간을 확장해야 한다. 영혼이 강건하고 충만한 사람은 소리의 공간이 매우 넓다. 아름다운 소리와 심령의 소리는 다르다. 오직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영혼이 깨어난다. 또한 말씀은 문자가 아니고 소리이다. 말씀이 소리가 되었을 때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며 충격을 주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큰 소리로 읽을 때 우리의 질병이 낫는 등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소리의 공간이 적은 사람은 외부의 소리를 몹시 시끄러워하며 듣기 싫어한다. 자기가 경험한 소리가 그 안을 꽉 채워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소리에는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소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소리를 지르고 공간을 넓혀 영과 마음이 확장되어서 강하고 너그럽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통성 기도는 논리적인 기도가 아니라 영감으로 하는 기도이다. 언어가 속에서 쏟아지는 것이다. 영으로 사로잡혀서 드리는 기도로 통성 기도에 익숙해진 사람은 기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통성으로 기도를 하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영감이 떠오르며 주님의 영이 기도를 인도하시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그러한 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 특히 발성이 부족한 사람은 우울해지며 그러한 사람의 묵상은 어두운 의식을 가져온다.

나쁜 기운을 소리로 토해낼 때 속이 치유된다. 그래서 부르짖는 기도는 생기가 넘치는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부르짖지 않은 깨달음에는 영적인 실제가 없다. 오직 발성이 충만할 때 응답이 선명하며 발성의 기초 위에서 다른 것들이 풍성함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항상 부흥이 있는 곳에는 소리가 있으며 악한 영들은 소리를 빼앗아 간다.

  부르짓는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도 적용해 볼 일이다. 우울한 사람은 표정이 어둡고 말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공감할만한 상대를 찾지 못해 기가 막히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 하나님을 향해 마음껏 부르짖는다면 들으실 것이다. 믿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므로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다. 그 증거로 독생자인 예수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받아들이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늘 지켜보시며 기다리신다.

 

월간<아동문학>, 계간<크리스찬문학> 동화 당선

KBS-1TV 드라마 소재공모 당선

광주일보 월간 <예향> 창간1주년 기념 <쓰고 싶은 이야기> 당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화순문인협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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