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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돌문학관/수필

만괴정(晩槐亭)의 추억

루스드라 2023. 9. 22. 10:27

<화순문화원 제출 원>

만괴정(晩槐亭) 추억

이성교(동화작가)

만괴정은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1구에 있는 정자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 측면 2칸이다. 1589(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이대립(李大立)13세 때 이곳으로 피난 은둔하여 생명을 보존하여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내력을 기리기 위하여 9세손 이경호(李京鎬)가 건립하였다.

<1997년 만괴정 모습>

만괴정은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괴목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괴정원기(晩槐亭原記) 앞부분에서 이경호는 다음과 기록하였다.

여수(汝水) 서쪽 이십 리(二十里 ) 영벽강(映碧江) 가에 마을이 있어 죽청(竹靑)이라 부 르니 곧 우리 9대 조고 죽계공(竹溪公)의 은둔한 곳이다. 자손들이 인하여 이에 거() 한지 전후 수백 년간에 자자손손이 승승(繩繩) 번영할 형세가 있으니 이 어찌 정착한 조선(祖先) 의 여경(餘慶)이 미친 바가 아니겠느냐 마을 우록(右麓)에 한그루 괴수(槐樹)가 있으니 선친 께서 수식(手植) 함이다.

 

죽청리 터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 즉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한다. 보통 좋은 터는 우뚝 솟은 주봉에서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가 감싸면서 앞에는 물이 있어야 제일이라고 전한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죽청리가 그런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만괴정은 우백호 줄기의 끝단에 자리 잡고 있어 풍광이 매우 수려한 곳이다.

편액에 걸린 <丁卯 陽和節> 시를 통해서 당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一槐編覆屋西東 半是淸陰半是風 養性爲要觀拘裏 繼家元在慕先中
尋芳雜野移花本 小路崖理石叢 不謝賓朋煩數至 溪山興趣幸余同
한그루 느티나무 집 동서(東西)를 덮었으니/절반은 청음(淸陰)이요 절반은 청풍(淸風)이 로다 을 기른 요점은 얽매임을 볼 것이요/집을 이은 근본은 慕先 가운데 있도다
잡야(雜野)에 꽃망울을 찾아 화본(花本)을 옮기고/적은 길 언덕가에 돌무덤을 쌓도다
손님이 자주 옴을 사양치 않으니/계산(溪山)의 흥취가 다행히 나와 한가지로다

 

만괴정은 죽청리 아랫마을의 서편 잿등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 뒤에는 푸른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려있고 그 너머 동산에는 자태 고운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댓잎을 스치는 솔바람이 사철 불어온다. 정자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마을이 있는 북쪽을 바람벽으로 작은방 한 칸을 두고 그 주위에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 냉방기가 없던 당시의 문명을 고려하여 최대한 트인 공간을 만들어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시원함을 더해 사방의 전경을 두루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까지 고려하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넓은 들판에서 자라는 곡식들이 펼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축제에 비길 수 없는 향연이었다.

남쪽으로는 마을 앞에 펼쳐진 들판을 지나 지석천 건너 넓은 들판에 있는 능주면 남정리를 지나 고인돌공원 뒷면인 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대곡리가 보인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화순천과 지석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양림보를 막아 건넌들의 농업용수로 썼는데 사철 물이 차고 넘쳤다. 그 모습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물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번쩍이는 물고기의 해 오름 맞이와 노을에 물든 물결이 이루는 해거름의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장면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10리 넓은 들판 끝 남쪽에는 비봉산이 목사골 능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괴정 상량문에는 능주 팔경의 하나인 영벽강 고깃배의 불빛이 보인다는 기록이 있는데 요즈음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이는 영벽정 철 다리를 지나는 기차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인다. 더 나아가 능주에서 동남쪽 10리 더 떨어져 있는 한천면 용암산 봉우리도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지석천을 따라 형성된 미곡리와 신덕리, 천암리와 신성리를 지나 남평으로 이어지는 경계가 보인다. 그리고 10리 멀리 펼쳐진 도곡평야 끝에 있는 도곡면 사무소가 있는 효산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만괴정은 내가 나고 어린 시절은 보낸 서편 고샅 중간에서 만괴정으로 가는 길과 갈리는 삼거리 잿등에 있었다. 같은 고샅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비슷한 높이에 있던 우리 집에서는 방문만 열면 훤하게 보였다. 그래서 만괴정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나는 좋은 놀이터로 몸과 마음을 키운 내 마음속의 고향이다. 친구들은 나무에 올라가서 가지를 타고 내려오는 시합도 하고 흔들며 그네를 타기도 했다. 때로는 대나무 총을 만들어 팽나무 열매를 실탄 삼아 총싸움도 했다. 그런데 병치래로 또래보다 왜소하고 겁이 많았던 나는 나무에는 오르지 못하고 구경만 했다. 그러다 심심하면 모퉁이에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배롱나무에 올라타서 흔들고 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큰 나무에 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하고 온몸을 떨며 꼼짝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본 친구들이 너도나도 땅을 보지 말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겁먹지 말고 괭이에 발을 디뎌야 한다고 침착하게 일러주며 용기를 주어 무사히 내려왔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가끔 그때 친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치던 소리가 들리는 듯할 때가 있다. 그렇게 만괴정은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만괴정에는 주로 남자 어른들이 모였는데 가끔은 나이 드신 할머니나 중년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나무뿌리에 앉아 땀을 식히기도 했다. 그 시절 만괴정에서 놀았던 듯한 여인이 남긴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이 노래는 죽청리로 시집온 여인이 마을을 떠나면서 불렀다고 전하는데 남편과 사별했는지 쫓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물 좋은 양림보/풍광 좋은 만괴정(두레제)/맛 좋은 개경 참외*/살기 좋은 죽청리/연분 없어 나는 간다

*개경 참외란 강변의 개간한 새들 땅에 심은 참외를 말한다.

 

만괴정의 구조는 방이 있는 북쪽을 제외한 3면이 이어져 있는 툇마루로 쉬는 자리와 놀이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정했다기보다는 방안의 아랫목을 집안 어른의 자리로 인정했던 관행과 같은 것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사방이 트이고 전망이 좋은 동쪽 툇마루를 차지하셨다. 중년은 남쪽 툇마루를 청장년은 어른들의 맞은편 방 건너인 서쪽 툇마루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마당에서 놀았다. 그렇게 비슷한 또래끼리 툇마루에 자리를 잡은 어른들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누워서 한낮의 더위를 식히며 고단한 몸의 피로를 풀었다.

어른들이 주무시는 동안 일부의 중장년과 청년들은 조심스럽게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어르신들이 잠을 깨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짜증을 내거나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어른은 그 소리에 일어나서 황급히 일터로 나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어른들의 넓은 아량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놀 때도 조심하라고 이르시며 안전을 먼저 염려하셨다. 어떤 어른은 소리치며 놀이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훈수도 하고 때로는 응원하며 함께 즐기기도 하셨다. 그런 어르신들의 여유롭고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만괴정 품 안에서 우리는 정각 마당을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꼰(고누)을 두거나 비석치기, 자치기 놀이로 몸과 마음을 키웠다.

이렇게 어린 시절 나의 몸과 마음이 자라며 꿈을 키우던 만괴정은 지금 볼 수가 없다. 몇 차례의 보수 작업으로 버티던 정자는 선풍기와 에어컨에 밀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 태풍 나비에 의해 무너진 후 만괴정 터에는 대나무가 무성한 가운데 깨진 기왓장만 뒹굴고 있다. 다만 어린 시절 오르던 아름드리 괴목과 팽나무는 하늘을 덮고 우거진 잡목들이 길을 막아서 그 좋은 풍광을 가리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하나의 고향이 내 마음에 묻히는 아쉬움에 가슴이 아린다.

마음에 묻힌 고향은 그것뿐이 아니다. 한 낮이면 강변의 넓고 푸르른 잔디밭과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어미 소의 평화로운 모습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두물머리 양림보에서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장구치며 멱감고 나와 은빛 고운 모래톱에서 두꺼비집을 지었던 삼각지는 준설과 제방 공사로 묻혀버렸다. 그런 고향의 모습은 이제 내 마음 깊이 묻혀서 가끔 흑백의 활동사진처럼 스쳐 갈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마을 숲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100미터쯤 되는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객지에서 생활하다 돌아와 보니 없어지고 없었다. 그것이 궁금했던 나는 어느 날 정각에 갔다가 숲이 없어져 버린 일을 무척 아쉬워하시는 어르신의 말씀을 들었다. 그때부터 그곳을 지날 때는 물론 다른 마을 앞 숲을 볼 때마다 마을 앞 수풀을 잃어버린 아픔을 느끼게 된다.

이제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에 묻히는 고향의 아쉬움은 가슴이 저미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런 마음을 시로 남기면서 언젠가는 숲과 만괴정 복원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대푸른마을竹靑里

李聖敎(竹溪公 14世 孫)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명당에

광산이씨 자작일촌 오백 년

괴목 우람한 잿등 위 만괴정에 올라

화순 지석 두물머리 곡창 이룬 너른 평야

잔디 푸른 강변 은빛 고운 모래톱 바라보며

박넝쿨 예지몽 구암 전설 엿듣고 꿈 키우던 곳

 

코스모스 반기던 오릿길 농로는 아스팔트에 묻히고

징검다리 건너던 여울목 콘크리트 다리 지나면

발길 붙드는 고샅길 낯익은 듯 낯선 풍경

언덕바지 흙담집은 묵정밭 오래련만

대나무 푸른 기상 하늘 향해 아우르고

그네 매던 뒷동산 소나무 너만 홀로 푸르구나

-2023년 여름-

 

*기축옥사란 조선 선조 22년 서인 정철이 중심이 되어 정여립 장군에게 역모죄를 씌워 동인의 영수인 이발을 함께 묶어 삼족을 멸한 옥사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331일 기사에 의하면 훗날 선조는 정철을 '독철(毒澈)'이라 불렀다. 그리고 악독한 정철이 내 선량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毒澈殺我良臣)며 정철은 동인들의 씨를 말리다시피 한 동인백정(東人白丁)’이라고까지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월간<아동문학> 동화 당선(92), 계간<크리스찬문학> 동화 당선(93)
KBS-1TV 드라마 소재 공모 당선(85)
광주일보 월간 <예향> 창간 1주년 기념 <쓰고 싶은 이야기> 당선(86)
··일 아동 동화교류 일본대회 호남·제주지역 인솔 단장(2004)
(작품집) ·중 아동문학 선집 2(94), 호남 시인 106인 대표 시선 하(99)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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